Exhibition Statement
값싼 시계와 반딧불이
더 이상 종소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값싼 시계’ 는 관습처럼 이어온 시계탑의 상징과 기능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 작업이다. 권위적인 통제 아래의 질서는 무력한지 오래되었다. 시계탑이 난립하지만 쓰임은 줄었다. 껍데기로 잔존하며 장식적 구조물이 되고 있다.
‘반딧불이’는 과거로부터 이어 온 낡은 주택의 변화를 생태적 구조로서 바라본 작업이다. 적절한 재료나 구조가 아니어도 된다. 그것이 조악할지라도 필요에 따라 반응하며 생존한다. 무질서한 외형은 적극적인 환경적응의 결과이다.
두 작업은 ’기계적 질서’를 의심한다. 효율을 위한 표준화의 시도는 대상의 존재방식을 형식적인 틀 안에 머물게 한다. 그러나 질서가 흐려질 때, 대상은 쉽사리 재단하기 어렵다. 그 틈에서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유기적 질서’가 드러난다.
Cheap Clocks
값싼 시계
잘 가나 싶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춘다. 건전지를 다시 교체해도 결국, 값싼 시계에 돈 들이기 아까워서 책상 위에 누인다. 2017년에 빅벤을 전면적으로 수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짤막하지만 전세계적 뉴스였다. 그 유명한 빅벤도 다 됐구나 싶었다. 시계탑은 시대의 흐름과 같이 가는 경향이 있다. 전쟁이 나면 건재함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작동해야 했고, 예상치 못한 기후의 변화도 함께 겪어왔다. 때로는 정치적인 이유로 기능을 제한하기도 한다.
시계탑은 때가 되면 종을 울리고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선이 곧은 형태로 높게 짓곤 한다. 누구나 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 그 형태를 볼 때, 권위적인 인상을 풍긴다. 공공화된 시간은 개인을 중앙집권적인 거대한 시스템 안에 종속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제국적 표준화의 상징은 진작에 멈춰 있었음에도 곱게 누이 듯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오래 전에 시계탑을 찾아다녔다. 당시에 잘 움직이던 시계가 근래는 고장난 채로 멈춰있거나 터무니 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철거되어 사라졌거나 위치를 옮기기도 한다. 찾지 못해서 돌아온 경우도 있고 동네 주민조차 시계탑의 존재를 몰라서 내가 알려주기도 했다. 적어도 예전에는 지역의 특산품을 머리에 앉고 있었는데 그러한 성의조차 없다. 적당한 가격으로 공원을 예쁘게 장식하려는 듯이 보인다. 밤에도 시간을 알 수 있도록 시계 후면에 등이 켜지는 경우가 많다. 최근의 시계탑은 회전 교차로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밝게 빛을 낸다.
시계, 탑은 유물에 가까운 듯하다. 기능을 잃고 단순한 구조물 또는 조형물의 성격이 더 강해 보인다. 다원적 네트워크가 확대될수록 산발적인 구심점을 따라 재조정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지나치다 눈길 한번 닿을 만한, 작은 시계탑이 우후죽순 세워지는 것은 그것이 더 이상 기존의 가치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개인과 공공의 시간은 달리 흐르고 권위도 희미하다. 상징과 기능이 사라진 값싼 시계는 전근대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확실한 개인화된 시간관념의 결과이기도 하다.
Fireflies
반딧불이
산길에서 낯선 곤충을 한 마리 보았다. 배가 불룩한 게 왠지 독하게 생겨서 다행히도 만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알아보니 잘못 만지면 물집이 생기고 흉터가 남는다고 했다. 외래종이라 생각했는데 토종이라고 한다. 중국산 뻘건 매미가 한창 날아들 때의 낯섦을 느꼈다.
반딧불이는 지금까지 두 번 보았다. 아주 어릴 적 시골의 천변에 낚시를 따라갔던 때, 있는 힘껏 불을 켜는듯 달아올랐다 가라앉았다. 신기했는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또 한번은 민통선 산골짜기에서 경계근무 중이었다. 이곳에는 수두룩한 줄 알고 지나쳤는데 그 이후로 볼 수 없었다. 도시로부터 멀리 살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고 하지만 세계적으로 흔한 곤충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나는 반딧불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볼 수 없다. 그저 빛이 나서 안다.
가끔 지나는 길에, 못 보던 건물이 들어섰다. 필로티 구조에 각이 지고, 껍데기는 짙은 회색 빛으로 깨질 듯이 반질반질하다. 익숙한 일이다. 갑작스러운 것도, 건너 편의 것과 똑같이 생긴 것도, 때로 극성을 부리는 듯한 것도 그렇다. 위치가 다르지 않다면 분간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옛날 ‘빨간 대문 집’과 같은 특별함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어딘가 붙어있는 건물의 이름으로 가름한다.
오랜된 주택은 살아있는 듯 보일 때가 있다. 모두 제각기 얼굴을 가진 것처럼 독립적이다. 환경에 적응하고 반응하며 증식하고 의태한다. 때로는 탈피를 하듯 확장한다. 셀 수 없이 많아서, 또 오래된 것이라서 익숙하지만 생태를 알 수가 없다. 그저 빛이 나서 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기와 형태의 지붕을 이용하는 경우이다. 아마도 살아남기 위한 위장 같은 것, 낯선 토종이 되기 위한 그들의 방식이다.